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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R

럭셔리하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세련되면서도 편안한 스타일

여행을 다니다 보면 정말 뜻하지 않게 좋은 사람이나 물건, 숍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알게 된 후 알고 보니 굉장히 유명하게 되거나 혹은 원래 유명했다면 왠지 모르게 어깨가 으쓱거려진다. 브랜드 론칭 때문에 파리 출장 갔을 때였다. 당시 배우 유호정의 스타일을 맡고 있던 터라 그녀를 위한 신발을 구입하기 위해 생토노레 Saint Honore에 갔다. 생토노레의 큰 대로변에서 작은 골목으로 꺽어 들어가는 곳에 있는 수제 구두집에 가려는데 평상시 안보이던 숍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로 된 숍은 자연 친화적이면서도 세련되었는데 여기에 데님과 데님 블루로 염색된 다양한 리넨 소재의 프릴 블라우스가 한꺼번에 여러장 디스플레이 되어 있다. 우리네 시골에서 보듯 빨랫줄에 길게 늘어진 프릴 블라우스가 멋지면서도 왠지 동양적인 느낌이 들었다.

in 45R via iphone6, 20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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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45R via iphone6, 20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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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랄프로렌같다고나 할까. 랄프 로렌이 데님을 언제나 프릴, 레이스, 앰브로이더리와 리넨과 면에 매치하면서 로맨틱 카우보이를 연출한다. 물론 프릴 블라우스에 A라인의 롱 드레스들이긴 하지만 정말 아메리칸 클래식을 제대로 연출하는 것은 랄프 로렌밖에 없다. 그런데 이건 뭔가 랄프 로렌 같지만 그렇다고 아메리칸 클래식 스타일은 아니다. 랄프 로렌만큼 데님도 많이 쓰고 리넨과 코튼과 같은 소재, 페이즐리와 플라워 패턴을 쓰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동양적인 것이다.
나무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플라워 프린트의 면 드레스는 <초원의 집>이 연상되는 랄프 로렌 드레스와는 사뭇 다르다. 그 이유가 플라워 패턴이 민들레나 나팔꽃과 같은 우리들의 눈에 익숙한 꽃이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리넨과 코튼이라고 말하기 보다 왠지 거친 마와 면 생지 같은 느낌이 동양적으로 느껴진다. 더군다나 블루 보다는 쪽색(짙은 청색)으로 물들여져 있어 소박하기 까지 하다.
프릴 블라우스와 A라인 드레스에 가죽을 매치하면 멋질 것 같아 가격을 보니 아름다운 옷과는 달리 가격은 아주 콧대가 높다. 이 때 점원이 자랑스럽게 말한다.
“저희는 하나하나 천연 염색을 손으로 직접해서 비쌉니다. 꽃 문양도 다 손으로 장인이 그려 염색했지요.”
벨기에의 디자이너 앤 드뮐미스터는 블랙을 모두 천연 염색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초창기 그녀의 작업실에 가면 커다란 통에 원단을 넣고 검게 직접 염색을 해서 옷마다 색이 조금씩 다른데도 불구하고 가격이 매우 비쌌다. 그 만큼의 수작업 느낌이 난다. 더군다나 울 소재의 커다란 숄은 영국의 타탄 체크이면서도 이게 또 동양적이다.
참 멋스럽고 럭셔리한데 화려하지 않아 좋았다. 모든 옷마다 작게 알파벳 ‘R’이 수놓아 진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가격이 너무나도 비싸 망설이는데 점원이 다시 말했다.
“여기는 파리여서 조금 더 비쌀 거에요. 동경이라면 모르겠지만”
그 때 알았다. 일본 브랜드라는 사실을. 그리고 얼마 후 다시 동경 출장 길에 마음 먹고 본점까지 찾아 갔다. 시부야에 위치한 본점은 생토노레보다 훨씬 크고 더 컨셉이 강한 숍이었다. 큼직한 나무 테이블과 생지로 된 천들이 곳곳에 늘어져 있어 어디 공방에 온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지금까지 내가 정말 좋아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in 45R via iphone6, 20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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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돌체 앤 가바나나 구찌와 같은 타이트하고 섹시한 옷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마지막 젊음을 불태우 듯 그렇게 파티와 클럽에 돌아다닐 때와는 달리 이젠 편하지만 나 자신을 멋스럽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스타일이 좋아졌다. 그런 나의 마음에 꼭 드는 것이 바로 45R인 것이다.
랄프 로렌보다는 동양적인 서정미가 있고, 에르메스보다는 소녀 취향의 고급스러움이 있고, 앤 드뮐미스터보다는 밝고 따뜻함이 있는데다 사카이보다는 조금 더 편하게 입을 수 있어 좋아한다. 국내에는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파리는 물론 뉴욕과 홍콩, 싱가폴, 중국에는 매장이 들어가 있을 만큼 매니아 층이 형성되어 있다.

in polascope. via iphone6, 20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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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a 45R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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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a 45R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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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동경이나 오사카, 쿄토에 가더라도 45R 숍은 꼭 들러서 눈이라도 즐겁게 한다. 그 만큼 소재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어디서 그런 아름다운 꽃 문양을 그리고, 또 쪽 빛으로 염색하는지. 그들 자신들도 ‘Ai Denim’이라는 이름으로 해외에 진출할 정도로 동양적인 데님 컬러를 천연 염색하는 것에 자긍심을 느껴한다.
대체적으로 교토에서 염색을 하는 45R은 그래서 비싸지만 한번 구입하면 꼭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는다. “어디서 그런 특이하고 예쁜 옷을 사셨어요?” 얼마 전 동경 출장 길에 다시 방문한 숍에서 두 권의 책을 발견했다. 45R의 디자이너가 분명 남자일 것이라 생각이 들정도로 데님과 스타일링 연출법이 굉장히 섬세하면서도 대담한 부분이 있었는데 예상밖에 자그마한 여인이었다. 그것도 머리가 희끗희끗 하얀데다 눈가에 주름이 있는데 이게 왠 일인가. 나이가 먹어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구나 감탄할 정도 우아했다.

in polascope. via iphone6, 20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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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야수미. 한자로 쓰면 전혀 다른 뜻인데 발음만으로는 ‘야수미’라는 단어는 ‘쉬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일까. 그녀의 옷은 일하면서도 쉬는 듯한 편안함을 준다. 그녀가 낸 책은 바로 베스트 셀러가 되어 나도 한권만 간신히 구입할 수 있었다. 책을 보면 디자이너가 좋아하는 식기나, 세상의 것들, 남편과 자신의 신변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에 대해서 조용히 글을 썼는데, 책을 읽으면서 아름답고 멋지게 나이를 먹을 수 있겠구나 싶어 꽤나 설레었다.

내가 45R을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선 좋은 소재와 아름다운 패턴을 사용하는 것도 그러하지만 여자를 똑똑하고 지적으로 만들어 준다. A라인의 리넨 드레스에도 이노우에 야수미는 언제나 바지를 매치하고 로퍼나 컨버스를 매치한다. 그리고 페도라나 파나마 햇으로 소년처럼 꾸며준다.
어딘지 여성스러우면서도 소년같은 순수함이 45R의 매력이다.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자연에서 모든 영감을 얻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냈다.”
라고 말하는 45R 디자이너 이노우에 야수미는 나무와 열매, 꽃과 같은 자연에서 모티브를 따온 패턴과 색상, 그리고 소재를 즐겨 사용한다. 그런 그녀가 영화 의상을 한다면 어떨까. 이안 감독이 영국의 문학 <센스 앤 센서빌러티>를 해석한 것과같이 절제된 아름다움을 잘 나타낼 것 같다. 특히 그녀는 에드워디안 시대나 빅토리안 시대 스타일에서 오는 서정적이고 여성적인, 그리고 소년과도 같은 분위기를 제대로 연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연친화적이면서도 기품있는 옷이기에 우아하면서도 편안한 것이다.

in 45R via iphone6, 20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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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옷을 디자인합니다. 그저 그 생각밖에 없습니다.”
라고 담백하게 말하는 이노우에 야수미를 보면서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교토에 매장을 크게 낼 정도로 일본적인 감성을 중요시 여긴다.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같은 교토에서 천연 염색을 고집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반면 아직 국내에는 젊고 트렌디한 한국 디자이너는 많지만 정말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안타깝지만 너무 한국적이거나 아니면 자칫 올드한 감성으로 연출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이나 스타일에 민감한 소비자들은 쉽게 등을 돌리고 만다. 한국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그리고 편안하고 조화롭게 연출해야 하는데 대체적으로 한국적인 것을 그대로 차용하기 때문에 어딘지 인위적이다.
색상도 그러하다. 백의민족 이전에 우리나라는 정말 아름다운 색상을 즐길 줄 아는 민족이다. 아산에 내려가면 아직도 쪽색으로 염색하는 장인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너무 어렵고 올드하게 보여져 일상 생활 속에 활용할 수 없다.

via 45R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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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야수미는 자신이 만든 옷을 포장하는 방법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로 치면 보따리에 해당하는 단어가 바로 ‘Furoshiki ふろしき’라고 한다. 옛날 다이묘 시대에 목욕 갈 때 펼쳐서 물건을 넣던 것에서 유래해서 보따리를 후로시키라고 부른다. “종이 쇼핑백에 그냥 물건을 넣어서 주는 것이 아까웠어요. 뭔가 스타일도 없어 보이고.”
그녀는 아주 일본적인 후로시키 방식으로 물건을 R자가 빨갛게 수놓여진 생지에 보따리처럼 포장해서 주게 했다. 이는 외국 사람들에게도 매우 인상적이었고, 심지어 나는 스카프로 곧잘 목에 두르고 다닌다. 주변에서도 이런 포장 방식이 좋아 작은 물건이라도 구입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했다. 결국 가장 동양적인 방법을 가지고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연출한 것이다.

via iphone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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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동양적인 것도 좋고, 편안한 것도 좋지만 내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멋부리며 나이를 먹을 수 있는 것에 요즘들어 관심이 많다. 너무 과하지도 않지만 너무 평범하지도 않은. 소박하면서도 멋진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나는 45R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Brand Infomation

동경 미나미 아오야마에서 오픈
2011년 파리 생제르만에 45‘ AI INDIGO Paris Saint German
현재 일본 외에도 싱가폴 뉴욕, 북경, 파리에 매장이 있다.

@45r__official